발롱도르(Ballon d'Or)
1956년부터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에서 수여하기 시작한 유서 깊은 상으로, 프랑스어로 '금빛 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유럽 리그의 유럽 선수들에게 수상하기 시작하여 1995년부터는 모든 유럽 리그의 선수들에게, 2007년부터는 리그와 국적 관계없이 전 세계의 모든 선수들로 기준을 확대했다.
그리고 발롱도르 포디움(Ballon d'or podium).
발롱도르 '시상대'로 직역할 수 있으며 발롱도르 1, 2, 3위를 흔히 발롱도르 포디움이라 통칭한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한 팀에서 모두 차지한 경우도 있으며 총 66회 수상의 긴 발롱도르의 역사에서 이러한 사례는 단 다섯 번 존재한다.
그렇다면 한 국가, 혹은 한 클럽의 선수들이 발롱도르 포디움을 독식한 경우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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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2년 - 서독
- 1위: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 - 81포인트
- 2위(공동): 게르트 뮐러(Gerd Müller), 귄터 네처(Günter Netzer) - 79포인트
1972년, 서독은 유로 1972에서 화려한 공격 축구를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 팀은 독일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패배가 유력했던 잉글랜드와의 최종 예선 1차전(공식적으로 대회 본선에 출전한 팀은 4팀이었기에 일반적으로는 8강 1차전으로 간주함)에서 3 대 1로 승리한 후 람바참바 풋볼(Rambazamba-Football - '활기 넘치고 어수선함'의 뜻을 가지고 있는 독일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주장이자 공격의 시발점이 되는 리베로였으며 귄터 네처는 최고의 패서이자 플레이메이커로 1972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게르트 뮐러는 결승전 멀티골을 기록하며 대회 득점왕에 오르는 등, 무결점 스트라이커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대회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세 선수였다.
또한 베켄바우어와 뮐러의 바이에른 뮌헨은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특히 뮐러는 한 해 동안 85득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훗날 리오넬 메시에 의해 깨지게 되는 한 해 최다 득점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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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1년 - 서독
- 1위: 카를 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 106포인트
- 2위: 파울 브라이트너(Paul Breitner) - 64포인트
- 3위: 베른트 슈스터(Bernd Schuster) - 39포인트
1980년의 발롱도르 위너이기도 했던 카를 하인츠 루메니게의 2연속 발롱도르 수상, 그리고 루메니게와 환상적인 파트너십을 형성했던 육각형 미드필더 파울 브라이트너가 2위를 차지했다. 이 두 선수는 '브라이트니게(Breitnigge)'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1970년 후반부터 1980년 초반까지의 서독과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었다. 특히 바이에른 뮌헨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는데, 당시 클럽의 별명이 'FC 브라이트니게'였을 정도였다. 1981년, 브라이트니게의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며 루메니게는 두 대회에서 모두 득점왕에 오른다. 또한 중앙 미드필더였던 브라이트너 또한 분데스리가 득점 공동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1981년 독일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한다.
분데스리가 베스트 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즉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차범근-

만 21세의 어린 중앙 미드필더였던 베른트 슈스터는 1980/81 시즌 초반, 쾰른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으며 이적한 첫 해부터 주전 자리를 차지하며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끈다. 그리고 1981/82 시즌 전반기에서 그는 17경기 10득점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의 스타플레이어로 발돋움한다.

또한 서독은 1980년부터 진행된 1982 월드컵 예선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8전 전승을 기록하며 본선에 진출한다.
같은 클럽의 세 선수는 아니었으나 유럽 최고의 세 선수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모두 서독이 차지했던 198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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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8년 - 네덜란드, AC 밀란
- 1위: 마르코 반 바스턴(Marco van Basten) - 129포인트
- 2위: 뤼트 휠릿(Ruud Gullit) - 88포인트
-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 - 45포인트
네덜란드와 AC 밀란의 한 해였다.
세 네덜란드 선수, 일명 오렌지 삼총사를 앞세운 네덜란드는 유로 1988에서 훌륭한 경기력으로 앙리 들로네 컵(The Henri Delaunay Cup - UEFA 유로 트로피의 명칭)을 들어 올렸으며 마르코 반 바스턴은 조별리그 잉글랜드전 해트트릭과 결승 소련전 득점을 포함한 5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른다.
또한 뤼트 휠릿은 반 바스턴이 부상으로 대부분의 경기에서 결장한 1987/88 시즌의 AC 밀란을 이끌었으며 그를 필두로 한 밀란은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987/88 시즌과 유로 1988 이후 AC 밀란에 합류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끝으로 당시 세리에 A 클럽에 허용되었던 3명의 비이탈리아인 트리오가 완성되었으며, 네덜란드 트리오는 1988/89 시즌 초반부터 팀의 핵심으로 활약하였다.

네덜란드의 AC 밀란 트리오. 같은 국적이자 같은 클럽의 세 선수가 발롱도르 포디움을 독식한 사례는 유일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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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9년 - AC 밀란
- 1위: 마르코 반 바스턴(Marco van Basten) - 129포인트
- 2위: 프랑코 바레시(Franco Baresi) - 80포인트
- 3위: 프랑크 레이카르트(Frank Rijkaard) - 43포인트
1989년 또한 AC 밀란의 해였다.
AC 밀란은 1988 서울 올림픽과 겹치며 1989년으로 연기된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세리에 A 우승 클럽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클럽이 겨루는 대회)에서 삼프도리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8/89 유러피언컵에서는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4 대 0으로 완파하고 빅 이어(Big Ears - 당시에는 유러피언컵이었던 UEFA 챔피언스리그 트로피의 별칭)를 들어 올렸다. 후자의 대회에서 마르코 반 바스턴은 결승전 멀티골을 포함한 9경기에서 10득점을 기록한다. 또한 세리에 A에서는 3위에 그쳤으나 반 바스턴은 리그 득점 공동 2위에 오른다.
또한 1989년 AC 밀란의 영광에는 프랑코 바레시와 프랑크 레이카르트의 몫도 컸는데, 프랑코 바레시는 철벽 수비의 핵심이자 주장으로서, 무결점 미드필더였던 레이카르트는 전술의 핵심이자 주전 미드필더로서 AC 밀란을 이끌었다.
지난해 발롱도르에서 2위를 차지했던 뤼트 휠릿은 7위에 그쳤다.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는 등의 활약을 펼쳤지만 피에트로 비르디스와 주전 경쟁을 하던 시기였으며 부상으로 1989/90 시즌에서의 활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발롱도르는 특별한 상입니다. 1989년, 저는 발롱도르 수상에 꽤 가까웠지만 2위였습니다. 그러나 속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반 바스턴은 현재의 메시 같았으며, 그의 뒤를 이은 2위는 그를 제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항상 팀의 승리와 우승이 가장 기뻤으며, 개인 수상은 후순위였습니다."
-프랑코 바레시(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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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10년 - FC 바르셀로나
- 1위: 리오넬 메시(Lionel Messi) - 22.65%
- 2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Andrés Iniesta) - 17.36%
- 3위: 차비 에르난데스(Xavi Hernández) - 16.48%
2010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 진출에 그쳤지만 라리가와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자신들이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한 바르셀로나였다. 그 중심에는 환상적인 미드필더 듀오였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차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가 있었다.

특히 리오넬 메시는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함과 동시에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고,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득점왕에 오르며 한 해 유럽 최고의 득점자에게 주어지는 상인 유러피언 골든슈의 주인공이 되었다.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차비 에르난데스는 201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더욱 돋보였다. 이니에스타는 칠레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 팀의 두 번째 득점을 기록하며 경기의 최우수 선수상에 선정되었으며,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에서도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며 역시나 결승전 최우수 선수의 주인공이 되었다. 차비는 해당 대회 1위 기록인 80km를 뛰면서도 역대 단일 월드컵 기록인 599회의 패스를 성공, 91.2%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며 스페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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